2020년 5월 30일에 시작되어 2024년 5월 29일에 종료되는 제21대 국회에서 장애인권은 찾아볼 수 없었다. 4년 동안 장애인권에 대한 법률안은 계류되다 결국 마지막 본회의에서도 처리되지 못한 채 폐기되게 되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5월 28일 기준 ‘장애’란 단어를 제목에 포함하여 발의된 법률안 407건 중 가결된 것은 41건에 불과하며, 계류 상태에서 결국 폐기 상황에 놓인 것은 무려 275건에 이른다. 제목에 ‘장애’를 포함하진 않는 법률안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폐기되는 장애인권 법률안은 더 많다. 국회가 관련 법률안이 의결은커녕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현실의 후폭풍은 모두 장애인이 경험하게 된다. 이는 ‘민생국회’를 외치던 국회가 등록 기준 5%가 넘는 대한민국 장애 국민의 민생을 외면한 것이고, 국민을 대표해야 할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폐기 법률안 ①: 의료기관 수어·문자통역사 배치 의무화
손끝사이가 요구했던 의료기관 수어·문자통역사 배치 의무화에 대한 법률안이 결국 폐기된다. 김영호 의원 등 13인이 발의한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서는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의 수어통역사 배치 및 문자통역 제공을 의무화한다. 홍석준 의원 등 10인이 발의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의료기관 및 공공보건의료기관의 수어통역사 배치를 의무화한다. 두 법률안 모두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 차이로 인하여 건강권의 중대한 침해를 경험하는 농인과 청각·언어장애인에 대한 권리 보장을 골자로 한다. 각각 2021년 11월, 2022년 5월에 발의되었지만 그로부터 2년 이상이 지나도록 법률안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거치지 못하였다.
폐기 법률안 ②: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 조항 삭제
현행 「최저임금법」은 장애인을 최저임금 적용의 제외 대상으로 편입하고 있다. 장애인을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장애인은 제대로 노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고정관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내용으로, 법률 자체가 장애혐오·차별의 온상이다. 장애인은 장애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편견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하는데, 법률에서조차 편협한 관점으로 장애인을 차별함에 따라 장애인은 양질의 일자리는 물론, 일자리 자체에서 소외되게 되었다. 이에 김예지 의원 등 37인이 개정안을 발의하였으나, 2020년 7월 이후 4년 가까이 계류 상태에 머물다 폐기에 이르게 되었다.
폐기 법률안 ③: 장애인 고용부담금 최저임금 수준으로 제고
「최저임금법」에 따라 일자리 자체에서 소외되는 장애인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공공기관 및 기업에서 장애인을 고용하여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등장한 법률이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이지만 학교법인 중앙대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기업에서는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 고용부담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그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 장애인 고용부담금이 실질적으로 장애인을 고용하는 유인책으로 작동할 수 있게 전혜숙 의원 등 12인은 2023년 11월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제고하는 개정안을 발의하였으나 결국 폐기 수순에 이르렀다.
폐기 법률안 ④: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에서의 탈피
김예지 의원 등 12인이 2023년 9월 발의한 「장애인기본법」 제정안, 장혜영 의원 등 16인을 비롯하여 2021년 및 2022년에 네 차례에 걸쳐 발의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안은 현행 「장애인복지법」의 장애에 대한 정의를 재정의한다. 기존 법률이 의료적 모델에 입각하여 장애인을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 정의한 것과 달리, 제안된 법률은 장애를 환경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하였다. 이는 세계보건기구의 「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ICF)」에 따른 것으로, 장애를 사회적 모델로 규정보는 것은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도 요구한 세계적인 흐름이다. 따라서 1981년 제정 이후 큰 틀에서 유지된 장애인에 대한 정의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역시도 제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된다.
폐기 법률안 ⑤: 포괄적인 차별 금지
「차별금지법」도 2020년 6월 장혜영 의원 등 10인을 시작으로 총 네 차례에 걸쳐 제안되었다. 「차별금지법」은 장애인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다. 장애인의 경우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개별법으로 존재하지만, 장애인-아동, 장애인-여성, 장애인-성소수자, 장애인-이주자와 같이 교차하는 소수자 정체성을 포괄하지 못한다. 전자의 경우 법무부 소관이지만, 후자의 경우 ‘장애인’이기 때문에 보건복지부 소관이라는 점에서 후자는 권리 보장보다도 복지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거센 백래시에 부딪혀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폐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장애인의 탈시설 자립을 지원하는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 시청각장애 당사자에게 적합한 별도 지원 정책에 관한 「시청각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 수많은 장애인권 관련 법률안이 폐기 예정이다. 제21대 국회에서 장애인권은 잊혔다. 5%가 넘는 등록 장애인, 그리고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어 그 수를 어림잡을 수도 없는 수많은 미등록 장애인이 모두 잊혔다. 제21대 국회는 정녕 모든 국민을 대표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제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우리는 묻는다. 그리고 요구한다. 제22대 국회는 장애인권 보장 약속하고, 실천으로 증명하라! 국민의 대표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법안 발의를 넘어 본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가결되는 실질적인 입법을 이루어내라!